
[영화 기본 정보]
제목: 비정성시 (悲情城市)
원제: A City of Sadness
장르: 드라마, 역사
국가: 대만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1989년 (한국 재개봉 2026년 5월 06일)
러닝타임: 157분
배급사: 알토미디어
감독: 허우 샤오시엔
출연진: 양조위, 진송영, 신수분, 고첩, 이천록
쿠키영상: 없음
수상 경력 및 평점: 제4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로튼토마토 신선도 97%
역사의 격랑 - 묵묵히 침묵을 삼키는 비극의 서사
198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며 세계 영화사의 지형도를 뒤흔들었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걸작 <비정성시>가 다시금 우리 곁을 찾았습니다. 이 작품은 대만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손가락인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대만 사회가 겪어야 했던 혼란과 국민당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스러져간 임 씨 가문의 4형제를 통해 우리는 '역사'라는 거대한 괴물이 어떻게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무참히 짓밟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 영화를 통해 서사가 아닌 '공기'를 기록하려 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격정적인 드라마로 소비하는 대신, 정적인 롱테이크와 절제된 카메라 워크를 통해 그 시대가 뿜어내던 우울과 무력감을 스크린에 고착시킵니다. 감독의 의도는 자명합니다. 역사는 영웅들의 무용담이 아니라, 시대의 부당함에 저항하다 사라져 간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으로 완성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비정성시>는 단순한 역사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가 강요한 침묵을 감내해야 했던 모든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자, 망각 속에 묻힌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감독의 집요한 집념 그 자체입니다.
대만 근현대사 - 서늘한 비린내
이야기는 1945년, 옥상에 앉아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듣는 임 씨임 씨 일가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은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합니다. 장남 문웅은 암흑가와 결탁해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둘째 문량은 전장에서 돌아와 정신적 외상을 겪으며, 셋째 문양은 상하이에서 돌아온 뒤 실종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넷째, 문청(양조위 분)이 있습니다. 문청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지식인들과 교류하지만, 그가 마주하는 세상은 점점 더 폭력적인 색채로 물들어갑니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서두르지 않고 쫓아갑니다. 식당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 가족들의 식사 자리, 그리고 시대의 압박에 의해 조금씩 쪼개져 나가는 가문의 파편들을 마치 관조하듯 보여줍니다. 특히 문청의 시선은 영화의 핵심입니다. 그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물이기에, 세상의 비명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침묵을 더 명확하게 포착합니다. 임 씨 일가는 시대의 파고를 피해보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잔혹하게 흘러갑니다. 권력이 바뀌고, 동료가 죽어나가고, 결국 가문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비극은 드라마틱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죽음과 상실로 완성됩니다. 문청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이 얼마나 차갑고 무정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후기 - 슬픈 도시의 기억
어두운 극장 안, 좌석 깊숙이 몸을 파묻고 영화와 마주한 2시간 37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40년대 대만의 한복판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묘한 체험이었습니다. 스크린 위로 흐르는 영상은 낡은 앨범 속 사진처럼 흐릿하면서도 날카로운 실체를 품고 있었습니다. 초반부, 임 씨 일가의 식당에서 왁자지껄하게 오가는 일상의 소음이 들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이 그저 한 가족의 평범한 일대기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허우 샤오시엔 특유의 고정된 롱테이크가 이어질수록 극장의 공기는 서서히 식어갔습니다. 문청이 운영하는 사진관의 적막은 내 귓가에 닿는 이명처럼 선명했고, 양조위의 무표정한 얼굴 뒤로 흐르는 시대의 비애가 내 안의 무언가를 툭 건드리는 듯했습니다.
영화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극장 벽면이 서서히 대만의 눅눅한 밤공기로 채워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2·28 사건의 비극이 현실로 다가오자, 스크린 속 인물들의 절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어 극장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특히 문청이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고, 거리에 나앉은 아이들을 보며 카메라를 조준할 때, 나는 손에 땀을 쥐며 숨을 참았습니다. 그 순간,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죽어간 이들의 유령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었고, 영화의 결말이 주는 그 허망함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조명이 켜졌을 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공기가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고, 내 주변의 풍경이 마치 영화 속 시대의 잔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었습니다. 157분 동안 나는 누군가의 고통을 빌려 입었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현실로 걸어 나왔습니다. 낡은 필름의 질감이 내 기억 속에 박제되어, 한동안은 이 슬픈 도시의 잔상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관람 후 생각
그러나 <비정성시>를 완벽한 걸작이라고 치켜세우기에는 몇 가지 지점에서 냉철한 비평이 필요합니다. 먼저, 허우 샤오시엔의 극단적인 '절제미'는 양날의 검입니다. 감독은 서사적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분위기에 집중하는데, 이는 원작의 배경지식이 없는 관객에게는 엄청난 진입장벽이 됩니다. 2·28 사건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다루면서도, 사건의 전말이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학 관계를 지나치게 파편화하여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역사의 방관자로 남겨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절제가 아니라 불친절함으로 느껴지는 이 연출은, 대만 역사에 무지한 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서사적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또한, 문청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지나치게 수동적이라는 점도 비판의 지점입니다. 역사적 격동기에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무력감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나, 영화 내내 그들이 침묵과 관조로 일관하는 모습은 비극의 깊이를 더하기보다는 때로 답답함으로 다가옵니다. 관객은 주인공의 고통에 이입하고 싶어 하지만, 영화는 끝내 그 고통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모호함의 안갯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러한 '모호한 미학'은 지적인 만족감을 줄 수는 있어도, 역사적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더불어, 영화 속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의 모습은 당대 시대상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희생적인 도구로만 소비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역사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지나치게 탐미적입니다. 죽음과 학살조차도 감독의 미학적 프레임 안에서 우아하게 그려지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이 가진 '날것의 고통'을 거세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평론가로서 보기에 <비정성시>는 분명 대만의 현대사를 각인시킨 중요한 마일스톤이지만, 역사의 기록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감과 영화적 미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그 시대의 슬픔을 공유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허우 샤오시엔이 설계한 아름다운 비극의 갤러리를 관람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이야말로 <비정성시>를 다시 마주할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민일 것입니다.
총평
<비정성시>는 거칠고 투박한 역사책보다 훨씬 더 깊은 흉터를 남기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억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화려한 볼거리와 빠른 호흡의 영화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낯설고 느린 걸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반드시 보아야 할 이유는 명확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망각 속에서 매번 새롭게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대만의 과거를 다루지만, 그 과거는 현재의 우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그 안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개인들의 모습은 임 씨 일가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즐거움을 찾는다면 이 영화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영혼을 건드리고, 시대의 고통을 영원한 예술로 박제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반드시 극장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앉아 <비정성시>를 마주하시길 바랍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 문을 열고 마주할 평범한 세상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올 것을 확신합니다. 비록 그 단맛은 쌉싸름할지라도, 진실을 마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깊은 슬픔의 미학을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B% B9%84% EC% A0%95% EC%84% B1% EC% 8B%9C)